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바꾸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고장나서인 경우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느려졌거나, 업데이트가 안 되거나, 쓰던 앱이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죠.
하드웨어는 멀쩡한데 소프트웨어 때문에 수명이 끝나는 겁니다. 이게 제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수명을 끝내는 두 가지

물리적 수명은 전통적인 문제입니다. 배터리가 닳고 부품이 고장납니다. 고치면 쓸 수 있는데, 부품을 구할 수 있고 수리 정보가 공개돼야 가능합니다. 여기서 나온 게 수리할 권리 논의입니다.
EU는 제조사가 수리 부품을 최소 10년 보유하고 같은 기간 수리 매뉴얼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여러 주에서 법제화가 진행됐고, 압력이 쌓이면서 애플도 셀프서비스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수명은 더 까다롭습니다. 보안 업데이트가 끊기면 하드웨어가 멀쩡해도 안전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앱이 최신 OS 버전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쓸 수 있는 기능도 줄어들고요.
업데이트가 의무인가
여기가 법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전통적인 하자담보책임은 인도 시점을 기준으로 봅니다. 그 시점에 문제가 없었으면 판매자 책임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들어간 제품은 인도 후에 새로운 취약점이 발견됩니다. 물건 자체는 그대로인데 환경이 바뀌면서 결함이 되는 셈입니다.
EU는 이 문제를 입법으로 다뤘습니다. 디지털지침과 물품매매지침에서 디지털 요소가 있는 물품에 대해 업데이트 제공 의무를 명시했고, 독일은 민법 개정으로 이를 국내법화했습니다. 2024년 채택된 새 제조물책임지침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대한 제조물책임까지 규정했고, 회원국들은 2026년 12월까지 국내법화를 마쳐야 합니다.
국내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규정이 없어서 해석에 맡겨져 있다는 게 법학계 평가입니다. 제조물책임법의 제조물 관찰의무에서 업데이트 의무를 도출할 수 있다는 논의가 있지만 명시 조문은 아닙니다.
2026년 9월에는 고가 전자제품의 집단적 품질결함에 대한 조사·교환·환급 제도를 요구하는 국회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조치했는데도 증상이 남는 경우를 어떻게 다룰지가 쟁점이었습니다.
지원 종료가 만드는 비용
지원 종료는 사용자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만듭니다.
윈도우 10 지원이 2025년 10월 종료되면서 멀쩡한 PC가 대량으로 교체 대상이 됐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확장 보안 업데이트(ESU)를 유료로 최대 3년 제공하는데, 이건 마이그레이션 기간 동안의 임시 다리로 설계된 것이지 수명 연장이 아닙니다. 보안 업데이트만 포함되고 기능 개선이나 기술 지원은 빠집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게 예산 문제로 직결됩니다. 2026년에도 SQL Server 2016, Office LTSC 2021 같은 제품의 지원이 순차 종료되는데, 지원이 끝나면 새로 발견된 취약점이 패치되지 않습니다. 업무에 쓰는 시스템이 그 상태로 남으면 공격 표면이 됩니다.
설계하는 쪽에서
서비스나 기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생각해볼 지점이 있습니다.
지원 기간 명시. 언제까지 업데이트를 제공할지 미리 밝히는 것만으로 구매자의 판단이 달라집니다. 일부 제조사는 보안 업데이트 7년을 약속하는 식으로 이걸 차별점으로 삼습니다.
구버전 호환. 최신 OS만 지원하도록 만들면 사용자의 기기 교체를 강제하는 셈이 됩니다. 어디까지 지원할지가 제품 정책이자 사회적 선택이 됩니다.
종료 시 대안 제공. 52일차 DRM 글에서 서비스 종료 시 구매 콘텐츠가 사라지는 문제를 다뤘는데, 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버 의존적인 제품은 서비스가 끝나면 벽돌이 됩니다. 종료 시 로컬 모드로 전환하거나 펌웨어를 개방하는 식의 설계가 가능합니다.
정리

"수리할 권리"가 부품과 매뉴얼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업데이트를 받을 권리가 논점이 되고 있습니다. 하드웨어를 고칠 수 있어도 소프트웨어가 죽으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제도는 EU가 앞서 있고 국내는 명시 규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구매 전에 지원 기간을 확인하는 정도가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응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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